보라카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신다.
현지에 사는 교민들도 보라카이가 처음 생겨날 때부터 계셨던 분들은 없으시기 때문에,
그저 구전으로 독일인 다이버들이 처음 섬을 발견하여 이 세상에 알려졌고, 관광객들이 점차
늘어난 이후엔 필리핀 현지 주민들이 초기 인프라를 마련하고 좀더 많은 사람들이 보라카이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후에 보라카이로 가는 마닐라-까띠끌란 비행기편이 생기면서 한국, 일본인
관광객들의 유입, 그 다음 세대가 중국인이라고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보라카이의 역사는 생각보다 훨씬 다양하고 오래되었다. 또, 우리가 전혀 몰랐던 사실도
많이 있다. 현지말로 거품이라는 '보라'와 흰색을 의미하는 '보카이'라는 의미가 합쳐져, 파나이 섬의
한쪽 끝에 지상 낙원으로 자리잡은 아티족의 마지막 천국 '보라카이'. 보라카이는 아무도 살지 않던
무인도였던 시절부터, 아티족이 소규모 농사를 짓던 시절, 현대에 들어와 전 세계의 방문객들이
방문하게 된 시점까지 긴 히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유명한 관광지이다.
스페인 식민시대~1900년대까지
파나이 섬의 마지막 비경이였던 보라카이는 몇백년 동안이나 현지 원주민인 아티족 말고는 아무도
살지 않는 조용하고 고요한 섬이었다. 보라카이로 가는 아무런 교통편이 없었으며, 존재 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스페인이 필리핀을 지배했을 당시 백여 명의 아티(이에타) 부족이 살았던 보라카이는
조그마한 규모의 농사와 어업, 염소를 키우는 등의 원시적인 활동만 일어났던 장소였다.
아티족이 섬이 거주하던 중, 다른 부족인 투모록 족이 보라카이에 들어와 다른 세력 구도를 만들었지만,
두 종족은 큰 다툼 없이 서로 조용히 잘 살아가고 있었다.
1900년대
보라카이는 1900년대 현지 아티인 들에게 땅을 사들여 보라카이를 개발했다고 알려진, 소피아 티롤, 그녀의
남편 람베르트 티롤(현지 판사)을 선두로 한 티롤 가문의 진출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보라카이 곳곳을
개간하고 농사를 짓고, 코코넛을 길러 야자수와 나무를 파는 사업을 크게 벌이게 되었다. 이 티롤 가문에서
다양한 가문들이 퍼져 나와 지금의 보라카이 부자들은 이들의 자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부터 관광이 활성화 되기 시작했다. 필리핀인과 외국인들이 지상낙원 보라카이의 소문을 듣고 조금씩
보라카이 섬을 방문하게 되었으며, 보라카이는 소규모 작물재배와 관광을 주요 산업으로 삼게 되었다.
1970년대
미국영화 '더 루저스', '투 레이트 더 히어로' 영화 두 편이 보라카이와 까띠끌란을 배경으로 촬영, 대중에
공개되었다. 또, 1978년 독일 작가, 젠스 피터는 보라카이에서의 경험을 '지상낙원'이라고 표현하여, 많은
유럽인들이 보라카이 관광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78년, 대통령 페르난디도 마르코스는 보라카이를 주요 관광지로 한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1980년대
보라카이로 향하는 관광객들의 발길은 꾸준히 늘기 시작한다. 보라카이의 화이트비치, 천연색 바닷가가
다이버들과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까띠끌란에서 보라카이로 오는 배의 숫자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1988년, 이런 보트를 정박시키기 위한 간이 항구가 4킬로미터 넘게 펼쳐진 화이트 비치
곳곳에 만들어 졌으며, 사람들은 이를 스테이션 1,2,3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본격적인 현대의 시설을 갖춘 호텔은 아직 보라카이에 등장하지 않았다. 필리핀 전통 스타일의
바하이 쿠보(대나무 오두막)등이 보라카이 관광객들의 숙박으로 쓰였다.
스테이션 1,2,3는 오늘날에는 더 이상 보라카이와 까띠끌란을 잇는 통로로는 사용되지 않지만, 지금도 그 지명은
남아 보라카이를 여행하는 사람들의 이정표가 되고 있다.
1990년대
이제 관광객들은 더욱 늘어나고 섬은 복잡해졌다. 많은 관광객을 수용하기 위해 호텔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상하수 정화 시스템과 물을 공급하기 위한 상수도도 설치되었다.(boracay tubig). 많은 필리핀 투자가들이
보라카이에 호텔을 짓기 시작했고, 외국 자본도 유입되었다. 가든호텔의 전신인 쉐라프 호텔(한국인이 주인),
리젠시 호텔 등이 이 시기에 세워진 호텔이다.
2000년대
2005년 글로리아 마카파갈 당시 필리핀 대통령은 보라카이를 주요 관광구역으로 지정하였고, 이에 따라
보라카이는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정부가 직접 관리하게 되었다. 이때문에 혼란이 더 가중되었는데, 장기적인 플랜이
아닌 단기적이고 임시방편적인 계획만 설립되어, 상하수도 시스템등 보라카이 관광 전반 산업에 많은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2012년에는 이런 여러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여행지 상을 받는 등 보라카이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2018년, 두테르테 대통령의 특수 지시로 보라카이 전체를 폐쇄하고 환경보호 및 재단장을 위한 시간을 가진다고
알려졌다. 약 6개월에 달하는 시간 동안, 보라카이 내부의 반발을 막기 위해 약 200명의 해병대원들이 보라카이
내부에 배치되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말이 많았는데, 보라카이가 속한 비사야 지방이 두테르테를 지지하지 않아
눈밖에 나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둥, 두테르테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방법이였다는 등, 또, 카지노를 짓기 위해
연막을 피우는 것이라는 등의 각종 구설수가 난무했다.
당시, 보라카이 상하수도를 전부 뒤집는다고 할 정도로 많은 공사와 리노베이션이 진행 되었고, 현지에 살았던
입장에서 메인도로를 넓히고 예전보다 상수도 문제가 많이 없어졌다는 점 등 좋은 점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예전과 그렇게 달라진 것이 없다라는 불평도 존재했던 시기였다고 기억한다.
이 시기, 수많은 중국인 관광객과 중국 자본이 보라카이에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보라카이는 6개월 후 재개장 이후
더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가 되었다.
2020년 코로나 시기를 맞아 섬은 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전 세계적인 통제와 이동 제한으로 누구도 보라카이를 찾지
않았고, 보라카이 내부의 거주민들은 큰 시련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2023년 현재, 보라카이는 다시 재개장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지만, 전 세계적인 경기 침체, 전쟁등으로 인해
아직까지는 예전과 같은 북적임은 볼 수 없게 되었다.
아름다운 바다와 하늘이 공존하는 천국의 섬 보라카이.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여행지중 한 곳인 이곳,
보라카이는 전세계 사람들에게도 사랑받는 세계저적인 여행지중 하나이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훌륭한 관광 인프라로 인해 미래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가
되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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