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의 독립영웅이라고 해야 할까? 필리핀을 수호하려고 했던 첫번째 전사라고 해야 할까? 지금도
필리핀 교과서 곳곳, 세부의 막탄 슈라인(신전), 필리핀 경찰 PNP의 어깨 한쪽에 붙어있는 '라푸라푸'의
이름은 현재도 잊혀지지 않고 필리핀 곳곳에서 불리워지고 있다. 라푸라푸는 용맹함과 강함의 상징으로,
필리핀 사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어린아이들에게도 라푸라푸라는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도 많다.
필자가 처음 세부에서 가이드를 하기 위해 방문했던 당시, 가이드 시작에 앞서 세부 곳곳을 돌아다니며,
관련 내용을 외우고 미리 학습했던 적이 있다. 그때 당시, 세부와 한국과의 관계를 알아가면서 막탄 끝자락에
있는 막탄 쉬라인에 방문했던 적이 있었는데, 한국에서 세워준 라푸라푸라는 인물의 동상을 보면서,
필리핀이 외세와 싸웠던 역사를 알게 되었고, 한편으로 반대편에 위치한 마젤란 상을 보면서 한국인의
관점에서 무척 신기했던 경험이 있다.
한국인이라면, 일본 강점기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국을 강제로 병합하여, 강점기동안
일본화를 시키기 위해 다양한 점유 활동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철저히 탄압하고, 조선을 일본화하기 위한
여러가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인 행동을 했던 것을 학교에서 자세하게 배운다.
비단, 일본의 강점 시기 뿐 아니라 더 뒤로 돌아가서는 북방민족과의 항쟁, 중국과의 치열한 다툼의 역사 등
한반도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여러가지 노력을 알지 못하는 한국 사람은 없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사상
이념, 국제 정세적인 문제로 인해 북한과 갈라져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긴 하지만, 간간히 들려오는 북한 소식에
의하면 북한 역시, 중국, 일본과의 관계를 그리 달가워하진 않는 듯 하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한국 사람이라면, 필리핀을 처음으로 침략하여, 여러 부족국가와 연맹을
맺고 필리핀의 식민 역사를 열었다고 평가되는 마젤란이라는 인물과 라푸라푸가 한자리에 있는 것을 쉬이 여길 수
없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라는 말이 있듯, 조선총독부 건물 및 일본 강점의 흔적을 최대한
지우려고 했던 한국인의 노력에 비추어 보아, 이런 일은 있을 수 없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최대한 가리려고 했을
것이 분명하다.
얼마 전이였을 것이다. EBS에서 필리핀에 가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였는데, 한국인의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르게,
많은 필리핀 사람들이 마젤란, 혹은 스페인에 대해 침략자의 나라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이겨 더 나은 필리핀인이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들은 필리핀 역사의 일부, 혹은 몇몇 학생들은 스페인에 가고싶다, 자신에게도 스페인의
조상이 있다는 말을 하면서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고 약간의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극단적인 민족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나라를 침범했던 국가에 대해 이렇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곳은 몇 되지 않으리라.
이후, 필리핀의 역사를 조금이나마 더 알게 되면서, 필리핀이라는 나라는 한반도와 같이 통일 왕조가 세워져 오랜 시간
유지된 나라도 아니였고, 한반도 크기의 1.5배 정도 되는 큰 국토에 여러 부족, 왕국들이 있었다가 차후, 스페인에게
지배당하고, 스페인에 독립할 때쯤 되어서, 당시 필리핀의 문명인, 지주 등의 부유 계층 위주로 '필리핀인'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고, 스페인에서 독립했던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되면서 이 의문은 조금씩이나마 풀리게 되었다.
한국과 같이 '단일민족'이라는 확고한 개념이 있었다기 보다 지역마다 각자 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면서 북부 루손의
중국계 민족들, 중부 비샤야스의 말레이 왕국, 남부 민다나오의 무슬림 왕국이 한 나라가 아니고 서로 교류하던 완전히
다른 민족이라는 사실을 비추어 본다면 크게 놀랄만할 것도 없다.
또한, 300년이 넘는 긴 식민지배 기간동안 스페인, 미국을 필두로 한 여러 민족들이 필리핀에 들어와 혼혈되었고, 또,
이들의 후손이 필리핀 곳곳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지금도 스페인계, 중국계 가문들이 정치와 경제를 틀어쥐고 있는 현실을
직시한다면, 마젤란과 라푸라푸의 그림자는 단지 필리핀 역사의 한 조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정체성은 있지만, 자부심은 없다'라고 했던가? 후세에 만들어진 필리핀 '인'이라는 개념은 필리핀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KKK 단(미국인종차별집단이 아님)이나,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라는 소설을 썼던 한국에도 잘 알려진 호세 리잘의 어떤,
민족주의 사상 속에서 나온 조금은 이기적인 개념일지도 모르겠다.
전후, 미국의 자본주의 물결과, 전세계 사람들의 아시아의 통로가 되어가면서 지금의 필리핀인은 필리핀인이라는
모습보다는 오히려 한국인보다 더 경제 최전선에 노출된 '세계인', '필리핀인의 모습을 한 경제인'이라고 보는 편이 더
맞을 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봤던 '필리핀 가정부의 고용을 시작하겠다'라는 뉴스, '이민청의 설립', 전세계에 퍼져있는
'해외노동자', '필리핀 출신 간호사와 시맨(선원)'의 사례를 봤을 때 더욱 그렇게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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